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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시작해 치열하게 달려온 7개월의 기록”

by 키득히죽 2024. 12. 11.

“어쩌다 듣게 된 무례한 한마디, 그리고 내 치열했던 7개월”

이건 그냥 흘려들을 수도 있었던 이야기다. 근데 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들었던 말이라, 그때마다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날도 평범하게 지나갈 뻔한 하루였다. 어떤 40대 중반의 남자가 "한국 사람이 외국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냐?"며 비웃듯이 얘기하던 그 순간까지는.

내가 알던 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말이었지만, 어이가 없어 그저 얼어붙었다.

말을 해야 할지, 웃어넘겨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웃긴 건, 내가 그 말을 들었던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었던 때라는 거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쩌면 그래서 더 그 말이 마음에 박혔을지도 모르겠다.

통장은 바닥, 현실은 냉혹

그때 나는 영어 강사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돈이 급하게 필요했다. 통장 잔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주 6일 밤새 일하는 야간 풀타임 잡을 잡았다. 그것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홀서빙 일이었다.

처음 부딪힌 낯선 세상

솔직히 말하면, 홀서빙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손님 앞에서 주문을 받고, 쟁반을 들고, 접시를 나르고, 테이블을 치우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첫날부터 실수를 연발했다. 주문을 잘못 받아서 주방에서 혼나고, 뜨거운 접시를 엎어버리기도 했다. 손님이 요청한 걸 깜빡해서 다시 뛰어가기도 했고, 쟁반을 잘못 잡아 컵을 떨어뜨린 적도 있었다.

낯선 환경에서 끝없이 부딪혀야 했다. 손님들의 표정과 말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고, 빠른 걸음과 정확한 판단이 필수였다. 몸은 녹초가 됐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배운 것도 많았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메모하고, 일하는 속도를 올리려고 동선까지 계산하며 일했다.

잠은 사치였다

밤새 일하고 새벽이 되면 집에 돌아왔다. 자는 건 고작 6시간이 고작이었다. 오후가 되면 다시 집을 나서서 개인 과외 두 개를 뛰었다. 수업 준비는 이동하는 시간 동안 해야 했다. 머릿속은 과외 학생들에게 가르칠 내용과 홀서빙에서 있었던 일들이 뒤섞였다.

몸이 힘든 건 둘째치고 정신적으로도 지칠 때가 많았다. 주 6일을 그렇게 채우고 나면, 일요일 하루만이 유일한 숨 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하루는 다음 주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달릴 원동력이 됐다.

7개월의 전쟁 같은 시간

그 생활이 7개월 동안 이어졌다. 버텨야 했고, 달려야 했다. 현실은 피할 수 없으니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날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걸 해내면 뭐든 할 수 있다.”

지금은 그 시절을 견딘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모든 어려움을 버티고 해냈으니까. 그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지만, 이제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 소중한 시간이 됐다.

성장의 한복판에서

홀서빙은 그저 임시방편으로 선택했던 일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에 부딪히며 얻은 인내심과 적응력은 내 인생의 중요한 자산이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넓었다는 걸 그때 배웠다.

지금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홀서빙도 해냈는데, 이건 못 할 리가 없다.” 그때의 나는 이미 나 자신을 이겨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조롱 섞인 그 한마디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무식의 이어 신념까지 있던 그 남자의 무례한 발언을 듣게 됐다. “한국 사람이 외국 가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그게 가능하긴 해?” 비아냥 섞인 그 말은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내 주변에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까지 나온 지인이 있다. 그는 지금 미국 캔자스에서 언어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 다른 지인은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언어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국적을 넘어 학문적 열정과 실력으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 남자는 아마도 그런 세계를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이 나를 향한 조롱이었는지, 세상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헛소리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는 자격지심의 발로였을지도.

편견을 이겨낸 나의 현실

나는 그 남자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때 나는 이미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통장 잔고는 점점 늘었고,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 세계만큼만 보고 말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내 현실은 그의 편견보다 더 크고 복잡했다.

나는 여전히 쉬지 않고 공부하고, 발전하고, 도전하며 살고 있다. 그때 그 말은 내 자존심을 흔들기는커녕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편견과 무지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들을 대하는 법

돌이켜 보면 그 남자의 말은 그저 그의 세계관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였다. “무식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남을 함부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는 걸 배웠다.

내가 겪은 그 시절의 치열한 7개월은 그저 힘들기만 했던 시기가 아니다.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 그 남자의 무례한 한마디는 더 이상 나를 흔들지 않는다. 나는 이미 그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으니까.